약산 김원봉 의열단 독립유공자였나? 빨갱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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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인 대통령이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식 추념사에서, 조선의용대의 무장투쟁은 오늘날 우리 국군의 창군 원동력이 되었다고 약산 김원봉을 언급해 이념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데요.

약산 김원봉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가의 자료가 방대하여 간략하게 작성을 해보겠으며, 북한으로 월북해 활동한 자료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약산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였고 1930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면서 중국내에서 "백범 김구 선생"이 결성한 한국국민당과 조선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고 조선의용대를 결성한 것으로 알려졌고요.

약산 김원봉은 1939년 백범 김구와 전국연합전선을 결성하여 7당을 단일당으로 통일하려 했지만 실패하였으며, 약산 김원봉이 주도한 조선민족혁명당은 1941년 임시정부에 참가를 결정했고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합편하면서 약산 김원봉은 1942년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했고 1944년 임시정부 국무의원과 군무부장을 하였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12월 약산 김원봉은 남한으로 귀환해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고 중앙인민위원과 군사부장을 맡았고, 1946년 조선공산당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할 때 5명의 의장 중 1인이 되었고 중앙위원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의용대 시절 약산 김원봉

1946년 9월 부산 철도 노동자 파업이 시발점이 되면서 다른 지역과 모든 직종의 노동자 25만명이 파업에  동참했고 미국의 군정의 정책 실패로 임금보다 물가 가격이 치솟고 가난한 사람들이 쌀 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파업은 항쟁으로 확산되었고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경찰이 쏜 총에 시민이 사망하자 시민들은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친일 경찰에 대한 반감과 식량부족, 독립 국가 수립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고요.

 

 

약산 김원봉은 1946년 10월 대구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을 당했고, 친일 경찰이었던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친일 경찰이 좌익단체에 대한 탄압과 테러를 바라보며 실망을 했고,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1930년 조선민족혁명당을 함께 결성했고 조선의용대를 결성 항일 무장투쟁의 독립투사로 활동했던 "백호 김두봉"과 월북을 하였습니다.

1948년 약산 김원봉이 월북할 당시 "백호 김두봉"과 월북했는데, 백호 김두봉은 약산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하기도 조선의용대를 결성해 활동하다 1940년 화북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추대되어 활동을 하였고 해방 후 북한으로 귀환하여 활동하다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약산 김원봉"을 데리고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1948년 월북한 약산 김원봉은 북한 장권 수립에 참여해 최고 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었고 1950년 6.25 전쟁에 참여했으며  전쟁기간 동안 분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1952년 북한이 6.25전쟁 공훈자에게 수여하기 위해 만든 훈장이 "노력훈장" 첯번째로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약산 김원봉은 1956년 7월 조선노동당 반혁명 분파로 몰려 박헌영이 총살되는 숙청이 단행되었지만  1957년 최고 인민회의 2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국회 부의장급)에  선출되는 등 승승장구했고, 1958년 3월 조선 로동당 대표자외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급에 있던 "백호 김두봉"은 숙청되었는데 당시 약산 김원봉은  노력훈장을 두 번째로 받으며 건재하였습니다.

하지만 약산 김원봉은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당했고 약산 김원봉은 남한으로 도망오려다 체포되어, 1958년 11월 중국 장제스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수용소에서 자결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북한이 약산 김원봉에 대한 것을 극비밀로 붙여 사실을 알 수 없는데, 약산 김원봉의 아내 최동선과 아들 김중근, 김철근은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약산 김원봉은 1898년 9월 28일 생으로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하여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며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항일 무장투쟁 독립투사로 활동하며 23번의 폭탄 의거를 합해 일제에 맞서 72번의 의거를 한 독립운동가였고, 일제는 백범 김구 선생보다 약산 김원봉을 두려워해 당시 100만 원 (현 340억 원)의 현상금을 걸기도 했습니다.

약산 김원봉은 1948년 백호 김두봉과 월북을 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가담했고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직을 지내기도 했고 노력훈장을 두 번이나 수여받았지만 결국 숙청되었는데, 약산 김원봉은 조선노동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약산 김원동은 일제 강정기에는 항일 무장투쟁을 하며 독립투사였지만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남한으로 귀국해 좌파와 우파 이념 싸움에서 좌파로 할동하다 북한으로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동참하였고 6.25 전쟁에 참가해 공을 인정받아 노력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결국 북한이 숙청해 정치범 수용소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약산 김원동 유족 측은 항일투쟁의 독립유공자로 선정해 줄 것을 여러 번 신청했지만 모두 북한에서 활동한 전력으로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있는데, 약산 김원봉은 독립운동가였지만 해방 이후 정치색은 좌파여서 좌파쪽에 치중했고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동참했습니다.

독립운동가였다,  공산주의자였다, 이념이 나뉘는 약산 김원봉은 항일투쟁과 독립운동가로 많은 활동했는데 이념은 뼛속까지 빨갱이 공산주의자는 아니였던 것 같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